익숙했던 공간이 두려운 공간이 되기까지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이 없이 가는 여행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늘 함께하던 발걸음, 가방 안의 사료 봉지,
그 아이가 낯선 곳에서 긴장하며 내 뒤를 따르던 모습까지.
나에게 여행은 곧 ‘그 아이와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없는 여행은,
마치 무의미한 이동처럼 느껴졌다.
펫로스를 겪은 보호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은
‘함께했던 장소’를 다시 마주해야 할 때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너무 따뜻해서,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죄책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든다.
나만이 남아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 달간 그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면서도,
그 어디든 그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발길을 멈췄다.
하지만 결국, 더 이상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이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살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펫로스 치유와 ‘회피 공간의 대면’이라는 심리 구조
펫로스(Pet Loss)는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심리적 외상(Traumatic loss)에 가깝다.
특히 반려동물과의 일상이 깊게 연결되어 있을수록
그 이별은 정서적·생활적·환경적 공백으로 나타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실 이후 회복을 위해
- 회피하던 장소와의 조심스러운 재접촉
- 감정 회피보다는 감정 대면을 통한 치유
- 새로운 ‘의미 재구성’을 통한 기억 전환
이라는 단계를 제안한다.
나는 여행을 통해 그 단계를 스스로 실천해보기로 했다.
그 아이와 함께했던 장소를 다시 방문하면서,
그 공간에 담긴 의미를 ‘아픈 기억’에서 ‘따뜻한 기억’으로 전환하고 싶었다.
그건 나에게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시작이었다.
떠나는 결심, 그리고 여행지 선택의 기준
처음 목적지를 고민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우리가 자주 갔던 동해 바닷가 소도시였다.
넓은 모래사장, 조용한 해변 카페,
그리고 그 아이가 파도 소리에 귀를 세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자주 머물던 장소를 ‘처음 여행지’로 택하면
너무 많은 감정이 밀려올 것 같았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장소지만,
풍경과 분위기는 닮아 있는 곳을 찾았다.
결정한 장소는 강릉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항구 마을.
바다도 있었고, 산책로도 있었지만
그 아이의 직접적인 기억은 없는 공간이었다.
그 선택이 나에게는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어줬다.
혼자 예약하는 모든 과정이 어색했던 순간들
여행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 아이와 함께할 땐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혼자가 되자 낯설고 무거웠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서
‘1인’ 객실을 선택하는 것조차 마음이 쓰였고,
짐을 꾸릴 때도 그 아이의 물건이 빠진 가방을 처음 마주해야 했다.
사료통, 물그릇, 방석, 간식 봉투...
그 어느 것도 챙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편안함보다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여행은 단지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을 마주하러 가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첫날 – 조심스러운 도착, 어색한 저녁
작은 마을의 기차역에 내리자
바로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 바람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조용히 리ュ크를 메고,
숙소까지 걸었다.
1인 숙소는 작고 따뜻했다.
문을 열자 작게 흘러나오는 음악,
향초 냄새,
그리고 생각보다 포근한 침구.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느슨해졌다.
짐을 풀고 나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고,
그 아이가 있던 시절이라면
바로 산책을 나갔을 시간이었다.
그저 앉아 있었다.
울지 않았다.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통과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
둘째 날 아침, 나는 산책로로 향했다.
숙소 주인이 추천해준 한적한 오솔길.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작은 벤치와 파도 소리가 함께 있는 곳이었다.
걷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그 아이와의 걸음이 떠올랐다.
발맞춰 걷던 그 리듬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살아났고,
발끝에 닿는 모래가 낯설지 않았다.
혼자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길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 아이의 부재를 감싸줄 만큼,
그 풍경은 충분히 따뜻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느꼈다.
함께 걷지 않더라도,
함께한 기억은 내 안에서 계속 걷고 있다는 것을.
여행이라는 회복 루틴 – 실제 효과
실제로 ‘여행’은 펫로스 치유에 매우 효과적인 회복 방법이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 환경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이 완화되며
✅ 걷기와 햇빛은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킨다.
✅ 또한 ‘새로운 풍경’은 ‘과거의 기억 고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 효과를 분명히 체감했다.
익숙했던 우울 루틴에서 벗어나
걷고, 바라보고, 마시고, 적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흐름이 달라졌다.
펫로스를 겪고 있는 보호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감정의 고여있음’을 깨뜨리는 작고 안전한 자극이다.
그 자극이 바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쓴 한 문장
여행의 마지막 날,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
나는 조용히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늘도 너를 기억하며, 나를 살아낸다.”
너와 함께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너를 잊기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이 여행은 너와 함께 살아냈던 나를
다시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이런 식으로,
너의 흔적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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