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장례

나는 왜 아직도 문소리를 들을 때 너인 줄 알고 돌아볼까

raenews 2025. 7. 2. 15:20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돌아보는 고개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순간의 반응은 생각보다 빠르다. 누군가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겠고, 정말로 소리가 났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내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바라보다가야, 그제서야 ‘아, 아니구나’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망이나 놀람이 아니라, 익숙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건 너였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너였던 시절의 소리다.
내가 집에 도착할 때마다 네가 먼저 문으로 달려오던 그 발소리.
내가 일어나면 나를 따라오던 네 걸음.
문을 두드리는 소리보다, 너의 반응이 먼저였던 시간들.

나는 그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내 몸이 잊지 못하고 있다.

 

반려동물 사망 후 일상

하루의 첫 소리는 너였다

매일 아침, 네가 일어나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정확한 시간도 없었다. 네가 기지개를 켜고, 방바닥을 툭툭 치는 소리,
아무 이유 없이 방 안을 몇 바퀴 도는 네 걸음,
가끔은 아침 햇살을 맞으며 코를 킁킁대는 소리.

그 작은 소리들이 쌓여서 나의 하루가 열렸다.
나는 알람보다 네 소리에 먼저 깼고,
눈을 뜨기 전에도 ‘아, 이제 일어날 시간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 소리들은 지금도 내 귀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대신, 나는 기억을 듣는다.
귀가 아니라 마음이 듣는 소리.
이제는 상상으로만 떠오르는, 그러나 너무나도 또렷한 너의 리듬.

공간이 기억을 불러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걷다 보면, 나는 네가 있었던 위치를 따라 걷는다.
밥그릇이 놓여 있었던 부엌 앞,
햇살이 비치면 늘 누워 있었던 창가,
내가 앉아 있으면 무릎을 베고 자던 소파.
이 모든 공간이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공간은 아무 말이 없지만,
나는 공간에서 너의 흔적을 본다.
특히 문 앞.
그 문 앞은 너의 자리였다.
내가 집에 오기만 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맞이하던 그 문.
가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데도,
그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 착각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건 착각이 아니라,
그리움의 그림자일 테니까.

네가 없다는 걸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소리 없음’이었다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건,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손으로 더 이상 만질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네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나를 무너뜨렸다.

네가 아프던 날도,
눈을 감던 날도,
나는 너의 작은 신음, 거친 호흡,
그리고 마지막으로 낸 낮은 울음을 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소리 없는 존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익숙했던 정적이
지금은 네가 없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말한다.
‘고요하니 좋겠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 고요는
네가 사라진 뒤 남은 공백이니까.

착각이 반복될수록 그리움도 깊어진다

문소리를 착각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정말 온 줄 알고 문까지 나갔다.
그러다 보니 몇 번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설마?’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 소리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제는 알아차린다.
그건 몸의 반사다.
기억의 반응이고,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흐름이다.

착각이 반복될수록 마음은 무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착각이 많아질수록 너의 흔적이 얼마나 선명한지 알게 되었고,
그게 곧 그리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착각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따라간다.
문 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문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돌아선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너를 다시 떠올리는 의식 같은 것이다.

그리움은 일상의 반복에서 나온다

나는 예전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출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일하고, 집에 돌아온다.
그 모든 흐름 속에서 나는 너를 떠올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언제나 문 앞에서, 나는 너를 떠올린다.

그건 아마도 네가 가장 나를 기다리던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관문이 열리기만 하면,
너는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이했다.
그 장면은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당연한 일부였다.
너는 집이었고,
너는 하루였다.

이제 나는 그리움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문소리에 반응하고,
여전히 창가에 비친 햇살을 보고,
네가 누웠던 자리를 눈으로 확인한다.

그게 나에게는
잊지 않는 방식의 이별이다.

감정은 시간보다 더 오래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너의 마지막 숨소리,
차가워지던 몸,
내 손에 힘없이 얹혔던 너의 발.

그 순간의 감정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시간이 지운 건 고통의 날카로움이지,
감정의 깊이는 아니다.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을 다루는 방법이 바뀌었을 뿐이다.
예전에는 울었고,
지금은 조용히 생각한다.
예전에는 피하려 했고,
지금은 담담히 꺼내 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회복이다.

누군가 그랬다. “그건 사랑의 연장선”이라고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사랑이 형태를 바꾼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너는 없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나를 움직인다.
문소리를 듣고 돌아보는 것도,
소파에 앉을 때 네 자리를 비워두는 것도,
햇살이 좋은 날 그 자리를 바라보는 것도.

그건 단지 습관이 아니라,
사랑의 반복일 것이다.
너는 내게서 떠났지만,
내 사랑은 아직도 네 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너를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

나는 네 사진을 꺼내 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진을 보며 위로받는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소리와 기억으로 너를 꺼내는 방식이 더 자연스러웠다.

문소리를 들을 때,
마루를 지날 때,
밤에 작은 인기척을 느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너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잘 있었지?”
“오늘도 네 생각했어.”
“조금 외로웠어.”

이건 내 방식이다.
나만의 추모이고, 나만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