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장례

펫로스를 경험한 뒤, SNS에 추모글을 올려도 될까? – 공감과 피로 사이의 감정 공유

raenews 2025. 7. 12. 23:08

떠난 그 아이, 그리고 손에 남은 스마트폰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난 날,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은 리드줄이 아니라 스마트폰이었다.
함께 찍었던 마지막 사진을 열어보다가, 어딘가에 그 감정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손가락은 SNS 앱을 눌렀다.
사진을 고르고, 캡션을 쓰고, ‘게시’ 버튼을 누르기 직전, 문득 망설임이 밀려왔다.

“이걸 정말 올려도 될까?”

누군가에게는 그냥 동물일지도 모르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글로 보일 수도 있으며,
공감보다는 피로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 안의 감정은 분명했다.
나는 지금 슬프고, 이 슬픔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펫로스 후 추모글 올려도될까

디지털 시대의 애도 방식, SNS가 중심이 되다

과거에는 죽음을 알리는 방식이 아주 제한적이었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거나, 부고장을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공식적인 장례 절차가 없는 경우가 많고,
그 슬픔은 가족 내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SNS는 그런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거창한 추모 게시물이 아니라,
단지 “그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디지털 애도(Digital mourning)**라는 개념은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학술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에서 슬픔을 공유하며
기억을 남기고, 위로를 받고, 공동체 안에서 회복을 시도한다.

반려동물의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기에,
공식적인 애도의 공간이 없기 때문에
SNS는 더욱 유효한 감정 창구가 된다.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을까, 기억을 남기고 싶어서였을까

SNS에 추모글을 올리는 보호자들은 대체로 한 가지 이유만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
‘위로받고 싶어서’, ‘기억하고 싶어서’, ‘그 아이가 있었음을 남기고 싶어서’
혹은 단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한다.

실제로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슬픔의 해소보다도 ‘기억의 기록’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

“잊히는 게 두려웠어요. 그 아이가 정말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어디든 남기고 싶었어요.”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그냥 그 아이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런 말들은 SNS가 단지 ‘관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한 조각을 묻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감과 피로의 모순된 시선

하지만 이런 디지털 애도의 방식은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않는다.
SNS에 반려동물의 죽음을 올리는 것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굳이 올려야 하나?”, “과하다는 생각 안 드나?”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시선은 **공감 피로(empathy fatigue)**와 맞닿아 있다.
타인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감정적으로 무뎌지고, 피로해진다.

그 결과, 감정적 콘텐츠는
공감보다는 회피, 또는 반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반려동물처럼 사람의 죽음과 비교해
‘가벼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주제는
그 반응이 더욱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슬픔의 무게가 아니라
그 슬픔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태도에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고,
누군가에게는 생명 그 자체였던 존재.
그 이별을 올바르게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이
SNS를 감정의 장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 공간에서 상처받는 이들도 만들어낸 것이다.

‘눈치 보이는 추모’라는 아이러니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후, SNS에 글을 올리려는 이들 대부분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흔들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이다.

실제로 많은 보호자들이
익명 계정이나 한정된 사람만 보는 공간에만 글을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슬픔은 사적인 감정이지만,
SNS는 철저히 공개된 공간이고,
공개된 감정은 언제든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올리고 나서 후회했어요.
좋아요 수가 적은 걸 보고 괜히 민망했어요.”
“댓글에 ‘또 강아지 키우면 되지’라는 말을 보고 한참 울었어요.”

이런 이야기 속에는
슬픔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디지털 문화의 모순이 담겨 있다.
공감은 쉽게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조용히 정리되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감정은 그런 방식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슬픔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추모의 글을 올리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그렇다면, SNS에 반려동물의 추모글을 올리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지만, 다음의 방식들이 공감 피로를 피하면서도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예시가 될 수 있다.

  • 너무 자극적인 사진(죽음 직후의 모습 등)은 피한다.
  • 짧은 문장으로 감정을 정리하되, 너무 설명적으로 쓰지 않는다.
  • ‘좋아요’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기억의 정리를 위해 기록한다.
  • 해시태그를 과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 사적인 계정이나 공유 범위가 제한된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고려한다.

중요한 건 누가 어떻게 반응할까보다, 내가 왜 이 글을 쓰는가에 있다.
SNS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 글의 목적이 ‘위로’나 ‘기억’이라면,
그 목적을 흔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애도를 표현할 수 있다.

 

누군가의 “좋아요”보다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의 기록’

SNS에 글을 올린 뒤, 생각보다 반응이 없거나
의외의 댓글에 마음이 다칠 수 있다.
“그냥 동물일 뿐인데 왜 이렇게 슬퍼하냐”는 반응처럼
무심코 던져진 말 한 마디가 긴 애도의 흐름을 단절시킨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중요해지는 건,
그 글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기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SNS는 기록의 공간이자 자기 서사의 일부다.
반려동물과의 시간, 이별, 그 슬픔까지
그 서사를 남기고 기억하려는 행위는
치유의 일환이자 자존감 회복의 과정이다.

슬픔을 글로 남기는 행위는 단지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서사적 정서 조절(narrative emotion regulation)’이라 부른다.
감정이 흐트러진 채로 머물지 않고,
단어와 문장으로 짜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꺼내
안정된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디지털 장례식 – 댓글과 리액션의 힘

추모글에 달린 댓글 하나가
보호자에게는 ‘눈물’보다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아이도 너와 함께여서 참 행복했을 거야.”
“내가 알던 그 아이, 천사처럼 착했지. 아직도 기억나.”
이런 말들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기억을 함께 가진 사람이 있다는 위로다.

특히, 반려동물이 가족 외에도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면
SNS는 그런 공동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추모 공간이 된다.
디지털 장례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진심 어린 리액션과 공유된 기억은
단절된 감정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단순한 댓글 하나에도,
보호자는 “이 슬픔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감정을 느낀다.
이 감정은 치유의 시작이 된다.
슬픔은 언제나 무겁지만,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그 무게는 분명히 달라진다.

슬픔을 보여주는 건 약함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SNS에서 슬픔을 드러내는 걸
‘약한 모습’, ‘감정 과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펫로스를 경험한 보호자에게
그 슬픔은 단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존재의 공백을 직면하는 과정이다.

그 존재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깊이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낸 이에게
그 감정은 절대 가볍지 않다.

‘울지 말라’는 말보다,
‘충분히 울어도 된다’는 말이 필요한 이유다.
SNS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슬픔을 드러내는 건
자기 연민이 아니라
정서적 정직함이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결국 더 건강하게 회복한다.
SNS에 추모글을 올리는 것은
눈물 자랑이 아니다.
그건 마음의 통로를 여는 용기다.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해도 괜찮다

누군가는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는 ‘또 그런 글이야?’라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모든 슬픔은 모두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 글이,
그 기록이,
나에게 진짜 의미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은 늘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모든 이가 같은 감정의 언어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SNS는 공공의 공간이지만,
감정은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공감받지 못했다고 감정이 틀린 게 아니다.
슬픔을 표현한 내가 과한 게 아니다.
공감이 없을지언정, 내 슬픔은 여전히 정당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 글은 내게 무엇이 되는가

몇 개월이 지나 SNS 추모글을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온다.
처음엔 울고, 나중엔 미소 짓고,
그 다음엔 그냥 조용히 바라보게 된다.

처음엔 ‘슬픔’이었던 글이
조금씩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사랑’으로 정리된다.

글을 올릴 당시에는 몰랐던
시간이 만들어주는 감정의 변화
SNS라는 기록을 통해 더 분명히 체감된다.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흐려진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 남긴 글은
그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힘들었고,
그리고 어떻게 조금씩 나아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SNS 추모글은 우리 시대의 ‘묘비’일지도 모른다

과거엔 묘지, 납골당, 사진첩이
사랑하는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SNS라는 공간이
감정의 묘비이자 기억의 저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댓글, 좋아요, 저장, 공유
이 모든 흔적은
죽은 존재와 남은 존재를 이어주는
감정의 끈이 된다.

디지털은 차가운 도구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글과 사진은
가장 뜨거운 감정의 기록이 된다.

죽음조차 기록되는 이 시대에
SNS 추모글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하나의 현대적 애도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결론 – 나의 슬픔을 표현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슬픔은
공감받지 못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반려동물을 잃은 슬픔을 SNS에 올리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게는 감정을,
누군가에게는 단지 존재의 증명을 의미한다.

누구의 기준도, 시선도, 판단도
그 감정의 정당성을 가릴 수 없다.

SNS는 선택일 뿐, 감정은 본질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해준다.

지금도 누군가는
슬픔을 삼킨 채
그 아이의 마지막 사진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글로 적어 내려가도 된다.
그건 당신의 슬픔이고,
당신의 사랑이었고,
당신의 삶이었다.